소동파와 동파육 - 음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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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흔히‘삼소‘(三蘇)라 칭한다. 그 중에 서도 가장 글솜씨가 뛰어났던 건 역시 소동파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천부적이었고, 문장 역시 출중했다. 그는 시사서화에 두루 능했으며, 유명한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소동파는 문학적으로도 칭송을 받았지만 미식에 있어서도 뛰어난감각 을 가진 이였다.
우리는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부른다. 그에 견준다면 소동파는 식신(食神)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음식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소재로 삼아 많은 시를 남겼다.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들은 속물이 되고, 돼지고기가 없으면 사람들은 마른다. 속물이 되지 않고 마르지도 않으려면, 끼니마다 죽순과 돼지볶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시가 있는 가 하면“… 황주(黃†)의 좋은 돼지고기, 값은 똥값과 같다. 부자는 먹고 싶어하지 않고, 가난한 자 어찌 요리하는지 모르니, … (중략)… 약한 불로, 적은 물로, 충분히 끓이면, 고기는 자연스레 맛있어 지고, 매일 한 그릇씩 먹으니, 당신은 내가 어찌 먹든 상관치 마라. ” 이 시는 소동파 특유의 소탈한 면모와 대범한 멋이 담겨있다. 해학이 가득 담긴 이 시는 소동파가 호북성(湖北省) 황주에 좌천당했을 때 쓰여졌다.
관료로서 소동파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옥에 갇히기도 했고, 죄를 뒤집어쓰고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황주로 쫓겨갔을 때는 소동파 개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상황을 평상심을 갖고 받아들였다. 황주는 아주 작고 찢어질 듯 가난한 동네였다. 마을은 깡촌이었지만 돼지고기 맛 하나 만큼은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맛있었다고 한다. 미식가로 유명한 소동파도 황주의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소동파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소동파 정도의 지위라면 먹는 것밖에 몰랐을 텐데 그는 요리하는 것도 즐겼다. 당시의 사회 풍조로 봐서는 상당히 유별났다고 할 수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동파육(東坡 肉)이라는 요리를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의 힘을 다해 알림으로써 대중화를 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이렇게 황주 돼지고기가 중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황주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됐으니 황주 사람들이 얼마나 소동파를 존경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호북성에서 존경받았다는 사실은 호북 지방의 돼지고기 요리에 동파라는 이름이 많이 붙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음식 이름에 동파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황주라는 작은 마을이 소동파 덕택에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지방 경제도 덩달아 번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동파육, 동파완자(丸子), 동파금각(金脚), 동파사자두(獅子頭), 동파수구(繡球) 등이 모두 돼지고기 요리다. 그 중에서 역시 최고로 꼽히는 건 동파육이다.
동파육은 홍소(紅燒) 요리의 최고봉이다. 홍소란 고기에 기름과 설탕을 넣어서 볶은 후 간장을 넣고 오래 익혀 검붉은 색이 나도록 하는 요리법이다.
동파육은 먼저 돼지고기 삼겹살을 껍질까지 붙은 채로 토막내 잘라서 기름에 튀긴다. 한 번 튀긴 삼겹살에 대파, 술, 간장, 설탕, 팔각 등을 넣고 센 불에 국물이 졸 때까지 익힌 다음 약한불로 장시간에 걸쳐 푹 고아낸 요리다. 껍질은 졸깃하고, 고기는 연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음식이다.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만 같은 삼겹살을 쪽파로 예쁘게 묶어서 내온다. 부드러운 삼겹살이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면 입안에 쪽파의 향기만 은은하게 남는다.
- 매일경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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